God and Dog (이선필)

‘신(God)’을 거꾸로 하면 ‘개(Dog)’가 된다.
신을 부정하면 ‘개’가 된다는 언어유희를 말하려 함이 아니다.
Dog=God라는 병치관계를 의미한다.
신과 개는 적어도 한 가지 사실에서 동일한 존재인 것만은 확실하다.
우리 인간들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준다는 것이다.
          북미 인디언들의 설화에 따르면 개는 신이 인간에게 반려동물로 선물한 유일한 동물이다. 세계 곳곳의 설화에서 개는 신의 분신이거나 대리인으로 등장한다. 그렇다면 신은 우리 인간에게 자신의 분신인 개를 통해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전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개의 몸짓과 시선 하나하나는 분명 그러한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일게다.

          작가는 다양한 방식의 작품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하고 있는 듯하다.

         

“개는 우리 인간에게 어떤 의미일까?”

         
“우리 인간은 개에게 어떤 의미이어야 할까?”

         

세계의 설화와 민간신앙에서 개는 인간에게 다양한 의미를 준다. 개는 때때로 인간의 수호자이며, 인간 영혼의 심판자이자 영혼을 영원한 안식처로 이끄는 인도자이며, 악을 물리치고 복을 가져다주는 행운의 마스코트이기도 하다. 신이 우리 인간에게 주는 의미가 바로 그것 아닌가? 그렇다면 작가가 우리에게 말하려 하는 ‘신과 개의 마음은 동일하다’는 주장은 부정하기 어렵다. 작가는 이러한 마음을 신으로 형상화된 개의 조상이나 문짝에 그려진 개들의 모습에서 찾고자 하고 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이 개 조각상을 문지방 아래 묻거나 집안 곳곳에 두어 악을 물리치려는 소망을 위트있게 재해석하고 있는 듯하다. 폭포수 밑에서 수양하거나 목탁을 두드리는 스님의 모습으로 형상화된 개의 도상들을 통해서는 마음의 안식과 복을 기원하는 신과 개의 마음을 동양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작가는 이를 통해서 개가 인간에게 주는 의미를 찾고 있다.

          고대 인도인들은 인간의 영혼과 동물의 영혼이 다르지 않고, 동물은 항상 신성하고 인간과 동일한 영혼을 가진다고 믿었다. 고대 페르시아에서는 개의 영혼의 1/3은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중남미의 창조신화에서는 신의 말을 거역한 인간을 개로 만드는 이야기가 나온다. 신화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개가 인간과 어떤 형태로든 관계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신화와 민간신앙이 늘 그렇듯이 허무한 이야기이지만, 인간과 개가 함께 살아온 역사는 그것이 결코 맹랑한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둘은 때론 협력하고 의지하며 같은 역사를 살아온 존재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역사의 동반자들을 지금 어떻게 바라보고 대하고 있을까? 그들에게 반려견 혹은 가족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지만 불편하거나 싫증이 나면 이름 모를 도로 위에 던져버리기도 한다. 때론 가족이라 불리는 이들의 이유없는 화풀이의 대상이 되어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기도 한다. 그저 유희의 대상으로 소비되다가 처분되는 의미없는 물건이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작가는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서 이러한 인간의 부도덕과 이기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 인간이 개에게 어떤 의미여야 하는지를 다시 질문하고 있는 듯하다.

두 가지 질문을 통해서 작가가 찾으려고 하는 것은 아마 우리의 가슴 속에서 희미해져 가는 사랑이라는 단어인 것 같다. 조쉬 빌링스가 단언하듯이 개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당신을 사랑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그들은 신의 마음처럼 우리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작가는 작품 위에 그려진 두꺼운 쇠사슬을 통해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