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듀, 당신이 보고 있는 모든 개의 모습에 (김맑음)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 즈음에 맞춰 개농장 근처는 분주해진다. 연말을 맞아 사람들의 수요에 맞춰 새로운 강아지를 만들기 위해서 교배시키기 때문이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오래 길러졌던 개들은 어딘가 낯선 곳에 내보내지거나 들어서게 된다.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이미지가 된다. 이것은 누군가가 보았던 개의 모습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이는 인터넷 화면 속에서 산타 복장을 한 귀여운 강아지의 이미지를 넘긴다.
          인간의 반려동물로 오랜 시간 자리잡고 있던 ‘개’는 우리의 사회 속에서 통상적인 도상을 갖게 된다. 귀여움, 충직함, 밝음, 애교, 믿음, 애완, 반겨줌, 그리고 사랑까지 말이다. 이 도상에 따라서 ‘개’는 우리의 역사 안에서 이미지적으로든 문자 그대로든 반복적으로 ‘재생산’되어 왔다. 역사라는 말이 으레 큰 맥락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 주변으로는 초점이 흐려진 부분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중 하나는 강아지의 탄생과 사라짐에 관련된 내용이다. 인간의 사회 속에 널리 퍼지게 되면서 반려동물은 일종의 사업처럼 여겨지게 되고, 개와 연관된 사업뿐 아니라 개 자체도 사업이 되어버렸다. 동시에 이 사업의 메커니즘 기저에는 어리고 귀여운 개의 이미지를 벗어나버린, 그래서 무심하게도 주인을 잃게 되는 개들의 이야기가 남게된다. 사라짐은 줄곧 탄생으로 이어지는 사업 메커니즘을 작동하게 했다.
          이 사업적인 메커니즘을 멈추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대신 전시 «신과 개의 마음»은 그 역사 자체를 흐리게 만들고, 그것을 다시 픽션의 모습으로 재구성하면서, 역사의 도상에 누락되어 있었던 개의 모습을 마주하게 한다. 이 모든 곳에는 개의 얼굴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얼굴을 정확하게 눈을 맞추고 바라본 적이 얼마나 있었는가 질문해본다.
          얼굴이라는 것은 레비나스에 따르면 “보여지는 것이 아니며 또한 어떤 대상도 아니다. 그 나타나는 것(apparaître)은 그 어떤 외부성으로 유지되는데, 이것은 당신의 책임감에 부여된 호출이거나 명령이다. 얼굴을 대면한다는 것은 즉시 이러한 요구와 질서를 이해하는 것이다.”¹라고 언급한다. 말하자면 이 얼굴의 근저에 있는 명령은 내 편에서는 책임의 요구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관계 속에서 얼굴을 바라보는 바라보는 자는 타자와 쉽게 끝내지 못하게 된다. 고갈되지 않는 구체적인 책임이 얼굴에 있는 것이다. 이는 곧 얼굴이 신의 말이 있는 장소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타자의 얼굴 속에도 늘 신이 담겨진다.²
          신이 찾을 수 있는 타자의 얼굴은 비단 사람만의 것은 아니다. 그렇게 이 전시는 개를 신의 모습으로 픽션화하여 구현하는 동시에, 흐려져 있었던 역사 주변부를 선명하게 주목한다. 그것은 애견 사업 메커니즘의 도상이면서 인터넷 속에서, 우리의 머리 속에서 남아있는 도상이기도 하다. 도상을 비껴가는 타자의 얼굴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마주해야 될 것인가. 고갈되지 않는 책임은 과연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 우리는 지금의 이 전시에 이르기까지 픽션과 논픽션으로 구성된 역사의 틈에 끼여있었던 이야기들을 꺼내본다.
          테레자는 죽음의 문턱에 있는 자신의 반려견 카레닌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것은 이해관계가 없는 사랑이다. 테레자는 카레닌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녀는 사랑조차 강요하지 않는다. … 그녀가 개를 키운 것은 그를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함께 살 수 있도록 그에게 기본적인 언어를 가르치기 위해서였다.”³
          그리고, 레비나스의 장례식장에서 데리다의 낭독을 이렇게 시작했다. “오래전부터, 아주 오래전부터 저는 두려웠습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에게 “아듀”라고 말해야 할 날이 말입니다. … “아-듀à-Dieu”[신Dieu-에게로à], 이 말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에게서 가져온 것입니다. 그는 이 말을 제가 달리 생각하도록 또는 달리 발음하도록 가르쳐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⁴
          그리고, 이 전시는 이렇게 덧붙인다. 신이 된 개의 모습에서 그들이 보고 있는 우리의 삶은, 그들 스스로의 삶은 어떠한지, 그렇게 그들의 언어로 대화를 건낼 수 있는지 말이다.